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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9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와 그의 첫 동료들이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복음적 생활 양식을 구두로 인준 받음

1223


「인준받은회칙 (Regula Bullata)」 최종 승인

1274


7대총장 성 보나벤투라 사후, ‘꼰벤뚜알(Conventuali)’ 과 ‘영성파 (Spirituali)'로 분열

1517


교황 레오 10세 ‘옵세르반티 작은 형제회’로 독립

1528


옵세르반티에서 카푸친 분리됨

1897


교황 레오13세의 일치교령으로 많은 분파들이 작은 형제회로 통합됨으로써 프란치스칸 1회로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 작은 형제회, 카푸친 작은 형제회로 고유 회헌을 가지는 형제회들로 확정됨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1209년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와 그의 첫 동료들이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복음적 생활 양식을 구두로 인준 받음으로써 공식적으로 교회 안에 자리 잡게 되었다. 이후 회개하는 삶을 몸소 실천하고 형제애를 세상에 드러냄으로써 '작은 형제들'의 수도회로 뚜렷이 확장되고 발전한다.

4차 라테라노 공의회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223년 11월 29일, 교황 호노리오 3세는 성 프란치스코가 작성한 회칙을 최종적으로 승인하는데, 이 회칙이 바로 「인준받은 회칙(Regula Bullata)」이다. 성 프란치스코에 의해 수도회가 설립될 당시는 세속화되어 가는 교회를 비판하는 청빈 운동이 성행하던 시기였다. 하지만 청빈 운동에 참여하던 이들 대부분은 이단적이고 반교회적인 사상과 결부되어 이단으로 파문되었다.

성 프란치스코는 이들과 달리 교회 안에서 교회 쇄신을 위해 청빈 운동을 전개하여 많은 열매를 맺었다. 많은 이들이 작은 형제들의 삶에 감화되어 작은 형제들의 수는 계속 증가하였고, 세상 안에서 프란치스코의 정신을 따라 살고자 하는 평신도들의 단체인 재속프란치스코회(O.F.S.)도 생겨났다. 이러한 성장 속에서 1274년 7대 총장이었던 성 보나벤투라가 세상을 떠나자, 수도회는 복음을 전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도시 안에 공동체를 세우고 살아가는 ‘꼰벤뚜알(Conventuali)’ 형제들과, 엄격한 가난과 프란치스칸 영성 가운데 은수자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영성파 (Spirituali)'로 불리는 형제들(나중에는 ‘엄수파[Osservanti]’)로 나누어졌다.

수도회의 이러한 내적 분열은, 이후 여러 교황들이 노력했지만 해소되지 못하였다. 결국 1517년, 교황 레오 10세는 ‘꼰벤뚜알(Conventuali)’과 개혁 그룹들이 단일한 조직으로 살아가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법적으로 완전히 분리시켜 모든 개혁 그룹을 ‘옵세르반티 작은 형제회’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게 하였다. 그리고 1528년에는‘옵세르반티(Osservanti)에서 개혁된 ‘카푸친(Cappuccini)’이 다시 분리되어 나왔다. 지금처럼 세 수도회로 확정된 것은 1897년 교황 레오 13세 때이다.

당시 ‘옵세르반티(Osservanti)’는 ‘리포르마티(Riformati)’, ‘알칸타리니(Alcantarini)’, ‘레콜레티(Recolletti)’ 등 많은 분파로 구성되어 있었다. 교황 레오 13세는 이들을 ‘작은 형제회(O.F.M.)’라는 이름으로 통합하였다. 이렇게 해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창설자로 모시는 수도회는 꼰벤뚜알 작은 형제회, 작은 형제회, 카푸친 작은 형제회로 모두 세 개다.

오늘날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수사들은 검은색 수도복을 입고 살아간다. 하지만 몇몇 선교지에서는 프란치스칸 본연의 잿빛 수도복을 다시 입는다. 수도회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과 대수도원을 초창기 때부터 지켜오고 있다. 그리고 로마의 성 보나벤투라 신학대학을 수도회 학문 연구의 중심으로 삼는다. 수도회 총본부는 로마에 있는 12사도 수도원이다. 현재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에는 약 오천여명의 형제들이 세계 각지에서 프란치스칸 영성을 통해 복음을 전하고 있다.


미사 서브 사진1
미사 서브 사진2
미사 서브 사진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