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OF KOLBE
성 막시밀리아노 콜베의 주요연보
폴란드에서 율리오 콜베와 바브로프스카의 둘째 아들로 출생(세례명:라이문도)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 수도회 입회
그레고리안 대학 철학과 입학
‘원죄 없으신 성모기사회’ 창설
로마에서 사제 서품
폴란드 귀국
‘성모기사지’ 창간
바르샤바 근교의 넓은 땅을 기증받아 ‘니에포칼라누프(성모마을)’ 건설
선교지 일본에 도착. 나가사키에서 일어판 '성모기사지' 창간
폴란드로 귀국
'아우슈비츠로' 연행'
감방동료 대신 아사형을 받아 순교
시복
시성
블로클라벡 교구, 로스 지방 시에라즈의 즈둔스카볼라에서, 아버지 율리오 콜베와 어머니 마리아 다브로브스카 사이에서 출생하다.
승천하신 동정 마리아께 봉헌된 성당에서 같은 날 라이문도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다.
파비아니체의 성 마태오 본당에서 에도아르도 스줄크 신부로부터 첫 영성체를 받다.
즈둔스카볼라의 성모 승천 성당에서 카시미로 즈지토비에카 주교로부터 견진성사를 받다.
파비아니체에서 민중의 사명에 대한 펠레그리노 학젤라 신부의 강론에 감화되어, 라이문도와 그의 형 프란치스코는 레오폴리에 있는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의 소신학교에 들어가다.
마리아 콜베는 남편의 허락 하에 레오폴리의 베네딕도 수녀회에서, 1913년부터는 그라코비아의 펠리칸 수녀회에서 봉사하면서 재속회원으로 지내다.
라이문도 콜베는 레오폴리에서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수도복을 입고, 막시밀리아노라는 수도명으로 수련을 시작하다.
막시밀리아노 형제는 관구장 펠레그리노 신부의 주례로 레오폴리에서 유기서원을 하다.
로마의 그레고리안 대학교에서 철학 공부를 시작하다.
폴란드 지방 공무원이었던 율리오 콜베가, 러시아인들이 재점령한 울즈크와 미에코브 사이에서 체포, 감금되었다가 후에 총살되다.
막시밀리아노 형제는 로마의 세라피쿰 국제 신학대학 구내 성당에서 수도회 부총장 도미니코 타바니 주례로 종신서원을 하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삼국 동맹에서 이태리가 탈퇴한 후(1915. 5. 4), 오스트리아와 싸움이 시작되다.
막시밀리아노 수사는 산 마리노 공화국에 들어가 시민권 획득에 필요한 절차가 끝날 때까지 약 1개월간 머무르다.
철학 박사 학위를 받다.
로마에 있는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성 보나벤투라 신학대학에서 신학공부를 시작하다.
원죄 없으신 성모님께서 알퐁소 라티스본느에게 발현하신지 75주년을 맞아, 막시밀리아노 형제는 로마의 세리피쿰 국제 신학 대학 구내 성당에서 묵상을 하던 중, 마리아의 신심단체를 세울 영감을 받다.
로마의 세라피쿰 국제 신학대학의 동료 수사 6명과 함께, “원죄 없으신 성모기사회(M.I.)”를 세우다.
발레의 성 안드레아 성당(S. Andrea della Valle)에서 로마교구 교황 대리 추기경 바실리오 폼펠리로부터 사제서품을 받다.
원죄 없으신 성모님께서 1842년 알퐁소 라티스본느에게 나타나셨던 성 안드레아 델레프라테 성당(S. Andrea delle Fratte)에서 첫 미사를 봉헌하다.
몬시뇰 도미니코 야훼 대주교의 청원에 따라, 교황 베네딕도 15세는 성모기사회를 구두로 축복하다.
수도회 부총장 도미니코 타바나 신부는 성모기사회를 공식문서를 통해 축복하다.
막시밀리아노 신부는 로마의 성 보나벤투라 신학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다.
조국으로 돌아오는 여행길에 오르다.
그라코비아의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신학교에서 교회사를 가르치기 시작하다.
그라코비아의 아다모 스테파노 사피아 몬시뇰이 성모기사회 회칙을 폴란드어로 출판하도록 허락하다.
막시밀리아노 신부는 그의 결핵을 치료하기 위해 자코파네로 가다. 그곳에서 그는 병원의 지도 신부를 겸하게 되다(현재 그 병원을 전염성 질환을 전담하는 진료소로 되어 있다).
나스차와에서 병의 회복을 위해 휴양하다.
로마교구 교황 대리 추기경 폼펠리가 성모기사회를 ‘원죄 없으신 마리아의 기사 신심단체’로 승인하다.
그라코비에서 성모기사회 첫 회지가 '라체르츠 니에포칼라네이(Rycerz Niepokalanej)'라는 이름으로 5,000부갈 출판되다.
성모기사지 편집실이 그라코비아에서 그로노드로 옮겨지다
성모기사지 1923년 1월호가 수동식 인쇄기로 자체 출판되다.
성모기사지에 삽입될 1925년 달력이 12,000부 발행되다.
바르샤바에서 개최된 제1회 가톨릭 대회(8.28-30)에서 저널리스트의 소명과 책임에 대해 강의를 하다. 이 대회에서 가톨릭 일간지는 그 출판을 요청하다.
막시밀리아노 신부는 다시 결핵 치료를 위해 자코파네로 가다.
성모기사회 창설 5주년을 맞아 교황 비오 11세는 성모기사지를 축복하다.
교황 비오 11세는 로마의 세라피쿰 국제 신학대학에서 설립되 성모기사회에 전대사를 허락하다.
막시밀리아노 신부는 자코파네에서 요양을 끝내다.
로마의 세라피쿰 국제 신학대학에 있는 성모기사회가 총본부로서 법적 승인을 받다.
막시밀리아노 신부는 치보로브스키 본당 신부를 만나, 요한 드루키 루벡기 왕으로부터 잡지 발간을 위해서 수도원 설립에 필요한 바르샤바 근교의 땅 입수 가능성을 이야기하다.
출판을 목적으로 하는 수도원 설립에 필요한 땅의 입수를 위해 드루키 루벡기 및 그의 재산 관리자와 접촉을 시작하다. 왕은 테레신에 소유하고 있는 5모르가의 땅을 제공하는 조건을 분명히 하다.
막시밀리아노 신부는 1927. 7. 19-21 사이 레오폴리에서 열린 관구 총회에서 알퐁소 오클리니 총장으로부터 수련장으로 임명되다.
테레신에 세운 원죄 없으신 성모 마리아상을 축성하다. 이 성모상은 미래에 세워질 출판 수도원 앞뜰에 세워지게 되다.
출판을 위한 수도원 설립을 시작하다.
니에포칼라누프의 수도원 설립이 법적으로 정식 허가되다.
성모기사 출판에 관계되는 모든 시설 및 수도자들을 그로드노에서 니에포칼라누프로 옮기다.
관구장 코르넬리오 추프릭 신부가 새로운 수도원을 축성하다. 수도원 가족은 신부 2명, 수사 18명이었으며 막시밀리아노 신부는 원장이 되다.
평수사 수련자들이 레오폴리에서 니에포칼라누프로 이주하다.
니에포칼라누프에 소신학교를 개설하다.
막시밀리아노 신부는 극동 지방의 선교를 위한 준비로 비인, 로마, 아씨시, 파도바, 토리노, 마르세이유, 루르드, 파리, 리지외, 아우스부르크, 뷔르츠부르그, 베를린, 토룬, 알렉산드로브 쿠자브스키를 방문하다.
첫 극동 선교사들이 니에포칼라누프를 떠나다(막시밀리아노 신부, 제노 제브로브스키 수사, 힐라리오 리사코브스키 수사, 세베리노 다지스 수사, 시지스몬도 크롤 수사). 바르샤바에서 로마로, 그리고 마르세이유까지는 기차로 여행을 했으며, 그 다음은 여객선 ‘엔젤’호를 타고 포트사이드, 지부티, 콜롬보, 싱가포르, 사이공, 홍콩을 거쳐 상하이에서 12일 동안 머물다. 세베리노 수사와 시지스몬도 수사는 중국어판 기사지를 출판하기 위해 이곳에 남고, 다른 이들은 나가사키를 향해 떠나다.
막시밀리아노 신부와 제노 수사 및 힐라리오 수사가 나가사키에 도착. 나가사키의 주교 몬시뇰 젠나로 하야사카는 이들 선교사들을 맞아들이고, 일본어판 기사지 출판을 허락하다. 막시밀리아노 신부는 교구 신학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다. 이들은 주교좌 성당 가까이의 임대 주택에서 거주하게 되다.
기사지를 나가사키에서 출판, 발송하기 시작하다. 10,000부 발행.
막시밀리아노 신부는 레오폴리에서 열린 관구 총회(7.21-24) 참석차 시베리오 철도를 이용해 귀국하다.
관구 총회는 일본 선교지방의 책임자로 막시밀리아노 신부를 임명하고, 그의 동생 알퐁소 콜베 신부를 니에포칼라누프의 원장으로 임명하다.
막시밀리아노 신부와 미에칠슬라브 미로크나 및 다미아노 에벨 수사와 함께 러시아, 시베리오 및 한국을 거쳐 나가사키에 도착하다.
니에포칼라누프 수도원 원장 알퐁소 콜베 신부가 코지코바가의 병원에서 죽다.
사회의 일본 본부가 나가사키의 오우라에 있던 임대 주택에서, 홍키의 외곽 히코산 중턱에 폴란드 선교사들이 세운 수도원으로 옮겨지다. 수도원의 이름은 ‘무젠자이노 소노(원죄 없으신 성모의 동산)’로 명명하다.
막시밀리아노 신부는 일본선 ‘아프리카 마루’로 제3의 니에포칼라누프 창설의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인도로 가다. 에르나쿨람에서 여러 관계 인사와 만나고 나가사키로 돌아오다.
관구 총회 참석을 위해 선편으로 폴란드로 돌아오다. 오는 길에 로마에서 3주간 머물다.
그라코비아에서 열린 관구 총회에 참석하여 일본 선교에 대해 언급하다. 나가사키 수도원 장상으로 전 관구장 코르넬리오 추프릭이 임명되다. 막시밀리아노 신부는 기사지 편집장과 전세계의 ‘성모기사회’일을 전담하게 되다.
폴란드의 교황대사 몬시뇰 프란치스코 마르막기가 오트복에서 막시밀리아노 신부가 준비시킨 일본 전권대사 프란치스코 카와이에게 세례를 베풀다.
막시밀리아노 신부는 베니스에서 여객선 ‘톤테로쏘’ 호를 타고 일본으로 돌아오다. 원죄 없으신 성모의 마을 원장으로 새로 부임하는 코르넬리오 추프릭과 함께 동행하다.
‘원죄 없으신 성모의 마을’에 소신학교를 개설하다.
막시밀리아노 신부는 선편으로 마닐라를 거쳐 제노바에 도착함으로써 완전히 전교지방을 떠나다.
그라코비아의 관구 총회에 참석하다. 폴란드 니에포칼라누프의 원장으로 부임하다.
1936년 7월의 관구 총회의 결정에 의거한 요청에 따라 수도회 베다 헤스 총장은 막시밀리아노 신부를 수도회 폴란드 관구의 종신 참사위원으로 임명하다.
막시밀리아노 신부의 노력으로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를 원죄 없으신 성모께 봉헌하다.
막시밀리아노 신부는 ‘성모기사회의 재조직’을 위해 이태리의 여러 도시(로마, 아씨시, 파도바)를 방문하고, 마리아 신심회로서 20주년을 맞는 축제에 참석하다.
니에포칼라누프 창립 10주년을 맞아 바르샤바에서 라디오로 말씀하다. 폴란드의 성모기사회의 보다 활발한 활동을 위해 5개년 계획을 시작하다.
‘지난해의 니에포칼라누프’라는 제목으로 바르샤바에서 라디오로 말씀하다.
니에포칼라누프에서 ‘라디오 니에포칼라누프 제3폴란드국’의 첫 시험방송을 하다. 막시밀리아노 신부는 방송개시 강연을 하다.
막시밀리아노 신부는 요셉 린키에브츠가 헌납한 대지를 살피러 로마노프카 지방의 레토니아로 가다. 그분은 이곳에 새로운 니에포칼라누프의 설립을 구상하다.
바르샤바 국무 회의실에서 개최된 출판 홍보관계 대표자 모임에 참석하다.
폴란드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관구가 2개로 분할되다. 그 하나는 바르샤바에 관구 본부를 두고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관구’라 하고, 다른 하나는 그라코비아에 관구 본부를 둔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와 스트레파의 복자 야고보 관구’라 부르게 되다. 니에포칼라누프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관구’에 속하게 되다. 막시밀리아노 신부 역시 폴란드 북쪽에 위치한 이 관구에 귀속하게 되다.
8월 23일 - 25일간에 가졌던 관구 총회의 결정에 따라, 막시밀리아노 신부는 다시 니에포칼라누프의 원장이 되다.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다. 이후 폴란드 정부는 9월 27일에 독일에 항복하다.
비오 바르토식 신부, 일본인 신학생 김 루도비코 수사와 35명의 수사들과 함께 독일 군대에 의해 체포되다. 람스돌프의 강제 수용소에 9월 21부터 수용되다. 9월 24일부터 암티츠에서, 그후 11월 9일부터 오스트르체스조브에서 수용되다.
막시밀리아노 신부와 동료 형제들이 오스트르체스조브에서 풀려나다.
막시밀리아노 신부의 청원에 따라 독일 관계 당국은 성모기사지 1회분(1940. 12-1941.1)의 출판물을 바르샤바 지역에만 배부하는 조건으로 허락하다. 120,000부를 간행하다.
막시밀리아노 신부는 게슈타포에 의해 체포되어 바르샤바의 파비악에 감금되다.
유스티노 나찜, 우르바노 치에슬라, 비오 바르토식, 안토니오 바예브스키 신부도 같이 체포되다.
막시밀리아노 신부는 수인을 가득 태운 기차에 실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이감되다. 이곳에서 수인번호 16670번을 받다.
7월 28일 - 8월 1일 사이에 아우슈비츠 소장 프리치가, 막시밀리아노 신부가 수용되어 있는 14A동의 한 탈주자에 대한 보복으로 10명의 죄수를 선택, 아사형을 명령하다. 막시밀리아노 신부는 아사형에 희생당하게 된 한 수인(프란치스코 가조브니체크)를 대신하여 죽기를 자원하다. 프리치가 이를 허락하다. 지명된 수인들이 13구의 지하감옥에 감금되다.
막시밀리아노 신부가 왼팔에 독약 주사를 맞고 죽다.
막시밀리아노 신부의 시신이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내 한 화장장에서 소각되다.
어머니 마리아 다브로브스카가 76세의 나이로 크라코비아에서 선종하다.
교황 바오로 6세는 막시밀리아노 신부를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복자로 선포하다.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하여 시성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