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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LIFE OF KOLBE


성모기사회의 창설자

성모기사회의
창설자

성 막시밀리아노 콜베의 생애
(1894 ~ 1941)


성모기사회의 창설자인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성인은

1894년 1월 7일 폴란드의 즈둔스카볼라에서 아버지 율리오 콜베와 어머니 마리아 다브로프스카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렸을 적 콜베의 이름은 ‘라이문도’였는데 열심한 부모에게서 엄격한 신앙교육을 받았고 훌륭한 성모신심을 몸에 익혔다. 1907년에 콜베 성인은 14세의 나이에 라부프 소신학교 들어갔고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게 되었다. 1912년에는 로마로 유학을 가게 되었고, 학업 중인 1917년 로마에서 동료 수사 6명과 함께 성모기사회를 창설하게 된다. 1918년 사제서품을 받고 다음 해에는 신학박사 학위를 따고 그 해 9월에 폴란드로 귀국하여 교수생활을 하다가 10월에는 본격적인 ‘성모기사회’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1927년 10월에는 땅을 기증받아 이곳에 ‘원죄 없으신 성모 마을’(니에포칼라누프)를 건설하게 된다.

이때부터 '원죄 없으신 성모기사' 잡지는

그 발행부수가 해마다 기하급수로 늘어나게 되었는데, 1927년에 5만부 발행되던 잡지가 8년 뒤인 1935년에는 70만부, 또 5년 뒤인 1940년에는 1백만부에 이르게 되었다.


세계 곳곳에 성모마을을
세우고 복음화 활동

성모의 마을이 세워진 지 3년이 지날 쯤에 콜베 성인은 아직도 하느님과 성모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깨닫고 동양 선교에 대한 사명을 가지게 된다. 그리하여 1929년 12월 30일에 폴란드를 떠나 다음해 1930년 4월 24일에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하게 된다. 콜베 성인의 선교에 대한 열정은 그가 일본에 도착한지 4주 만에 일본어판 ‘성모기사’ 잡지를 출간한 것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3년 뒤인 1933년에 일어판 ‘기사지’는 월간 5만 부의 발행부수에 이르는 잡지가 되었다. 콜베 성인은 일본에 도착한 지 1년 뒤인 1931년 5월, 히코산 홍고시의 외곽에 땅을 얻어 ‘원죄 없으신 성모마을’을 설립한다. 그의 선교 열정은 일본에서만 머물지 않고 1932년 6월에 새로운 성모마을을 세우기 위해 인도로까지 떠나게 된다. 그 뒤 일본으로 돌아와 잡지를 더욱 발전시키며 선교활동에 전념했다. 이렇듯 선교에 대한 콜베 성인의 열정은 한계를 모른 채 전진하며 세계 곳곳에 성모마을을 세우고 복음화 활동을 벌였다.


아우슈비츠에서의 고난과
복음활동

1936년 콜베 성인은 폴란드의 성모 마을 원장에 선출되어 폴란드로 돌아오게 된다. 당시 유럽은 나치의 위협 속에 있었고 폴란드 역시 1939년 9월 군대의 침입을 받게 된다. 1941년 2월 17일 콜베 성인은 나치 비밀 경찰에게 체포되어 파비악 형무소에 갇히게 되는데, 체포 이유는 그가 100만부에 이르는 잡지 발행자로서 폴란드 국민에게 커다란 영향과 권위를 지녔기 때문이었다. 이곳에서 콜베 성인은 자신을 돌보기보다는 혹독한 고문으로 고통 받고 있던 많은 이들에게 고해성사를 주고 그들과 함께 기도하며 위로해 주었다. 그 해 5월 28일, 그는 ‘죽음의 수용소’라고 불리던 ‘오센침’(아우슈비츠)로 이송된다. 수용소에서 콜베 성인은 사제이기에 더욱더 혹독한 강제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콜베 성인은 힘든 상황에서도 결코 평온함을 잃지 않고 자신이 더 어려우면서도 주위에 절망하고 있는 수감자들을 오히려 위로하고 고해성사를 주었으며, 처벌의 위험을 무릅쓰고 틈틈이 설교와 면담을 해줌으로써 수감자들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평화를 심어주는데 전력했다. 그러다 때론 발각되어 심한 구타로 실신까지 했지만 그분의 이런 활동은 좌절할 줄 몰랐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놀라운 사랑

막시밀리아노 신부가 아우슈비츠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충격을 주고 놀라움을 준 사건이 터졌다. 한 죄수가 탈출을 한 것이다. 수용소 규칙에 따르면 한 죄수가 도망쳤을 경우 그 사람이 속한 감방의 10명은 끔찍한 지하 감방에서 기아로 죽게 되어있었다. 소장은 죄수들을 광장에 열을 지어 세워 놓고 아사감방으로 갈 희생자 10명을 골랐다. 소장에게 지명 받고 아사감방으로 떠나게 된 사람들은 울거나 동료들에게 작별을 고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중 한 사람, 프란치스코 가조브니체크라는 사람이 자신의 가족들을 보고 싶다고 울부짖었다. 이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한 죄수가 열에서 나와 그 사람 대신 자신을 바치겠다고 한 것이다. 그는 바로 콜베 신부였으며 이렇게 해서 콜베 신부는 그 죄수를 대신하여 다른 9명의 죄수와 함께 아사감방에 가게 되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콜베 신부는 인간이 세운 가장 사악한 곳을 사랑 가득한 마음으로 정복하였다. 그는 다른 9명의 수감자들을 격려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고 위로해 주었다. 그분의 행동에 간수들까지도 그를 존경하였다. 죄수들은 굶주림으로 하나 둘 잇따라 죽어갔고 마침내 콜베 신부님을 포함한 4명만 남게 되었는데, 콜베 신부님은 결국 그들과 함께 독약주사로 죽게 된다. 이렇게 콜베 성인은 47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는데, 그 날은 1941년 8월 14일, 바로 성모승천 대축일 전날이었다.


성화소개

오른쪽의 성화는 성모기사회 창설자인
막시밀리아노 콜베 성인의 이야기와 상징을 담고 있습니다.


먼저 예수 성심과 성모님, 그리고 콜베 성인을 보실 수 있는데, 오른쪽 위 심장의 흰 빛은 예수 성심에서 뿜어 나오는 은총의 빛을 상징합니다. 두 개의 관을 들고 계신 성모님의 모습은 성인의 어린 시절 사적 계시를 말합니다. 성모님께서 나타나시어 흰 관과 붉은 관을 보이시며 어느 관을 원하느냐고 물으시자 어린 콜베는 둘 다 원하였다고 합니다. 이때 흰 관은 순결을, 붉은 관은 순교를 각각 상징합니다.

성인의 모습에서 오른쪽 검은 옷은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 소속의 수사였음을, 왼쪽 죄수복과 목의 붉은 영대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사제의 신분으로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강제 연행되어 갇히셨고, 같은 감방 동료가 사형선고를 받자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 그를 대신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며 순교하셨음을 각각 상징합니다. 이로써 어린 콜베가 꿈속에서 성모님께 받은 흰 관과 붉은 관의 의미가 이루어졌습니다.

1982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사랑의 순교자’로 시성하셨습니다.

성화소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