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IRITUALITY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1181/82 ~ 1226)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영성에 대해 알기 전에 먼저 수도회의 창설자인 성 프란치스코에 대해 아는 것은 중요하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1181년 혹은 1182년 겨울 이탈리아 움브리아(Umbria)지방의 소도시 아시시(Assisi)에서 부유한 포목상 피에트로 베르나르도네(Pietro Bernardone)의 아들로 태어났다. 처음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지만, 후에 아버지에 의해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프란치스코는 아버지의 많은 재산 덕분에 어려서부터 이미 부와 명예를 누렸으며, 동료들 사이에서는 무절제한 선동자로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성 보나벤투라는 대전기에서 프란치스코가 타고난 착한 성품 때문에 “선천적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많았다.”라고 기록한다. 프란치스코는 당시 다른 젊은이들처럼 부유한 상인이나 기사가 되기를 꿈꾸었다. 1202년 아시시와 페루지아 사이에 일어난 전쟁에 참가하여 기사의 꿈을 실현해보려 했지만, 오히려 불행히도 페루지아에 잡혀 1여년 동안 포로 생활을 하였다.
포로 생활에서 풀려나 아시시로 돌아온 그는 긴 회복기를 거치는 동안 깊은 영적 변화를 맞이하여, 세상이 주는 일시적인 기쁨 대신 주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영원한 기쁨에 서서히 젖어 들었다. 그리하여 세속의 모든 생활을 벗어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프란치스코는 다미아노 성당에서 기도하다가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 “프란치스코야, 쓰러져가는 나의 집을 고쳐라.” 주님의 이 말씀은 앞으로 그와 그의 동료들이 교회 안에서 수행하게 될 역할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이 일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은 1208년 2월 24일 성 마티아 축일에 프란치스코는 사도들의 파견에 관한 복음 말씀(마태 10.9-12 참조)을 듣게 되었다. 하느님 나라와 회개를 선포하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말아야’한다는 이 말씀은 이후 그의 생활 양식이 되었다. 프란치스코는 이 말씀을 가난과 복음 전파에 대한 계시로 알아듣고 깊은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확실히 깨닫기 시작하였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이 영적 차원의 교회 쇄신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깨달은 것이다. 이 무렵 프란치스코의 회개 생활에 감명을 받아 그와 같은 삶을 살고자 희망하는 ‘첫 동료들’이 생기기 시작하였는데, 프란치스코와 그의 첫 동료 12명은 리보토르토(Rivotorto)에서 움막 생활을 하였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의 삶에 감명 받은 많은 이들이 모여들자 프란치스코는 자기 자신이 더는 그들의 유일한 생활 규범이 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1209년, 자신의 첫 동료들과 함께 로마로 가서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자신들의 복음적 생활 양식을 구두로 인준받았다. 이로써 ‘작은 형제회’라는 교회의 공식적인 수도회가 탄생하게 되었다.
교황의 인가를 받은 후 작은 형제회는 급속하게 성장하였다. 수도회가 계속 성장하자 프란치스코는 작은 형제들의 생활 규범을 성문화하여 회칙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그는 1221 년 전체 23장으로 된 「인준받지 않은 회칙」을 썼고, 이어 1223년 교황 호노리오 3세의 인준을 받아 현재 사용하고 있는 「인준받은 회칙」을 작성하였다. 이 회칙은 간결하면서도 수도회의 복음적 소명을 강하게 드러낸다.
예수 그리스도를 그대로 닮기를 열망했던 프란치스코는 죽음을 2년 앞둔 1224년 9월 17일 라 베르나 산에서 오상을 받았다.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와 완전히 일치를 이루는 큰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그날부터 세상과 모든 피조물은 프란치스코 안에서 더욱 새롭게 변화되었다: “모든 피조물들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선하심에 깊은 애정을 느꼈다.” 프란치스코는 자연 만물이 창조주 하느님을 찬미하도록 이끌었으며, 모든 피조물을 형제와 자매라고 불렀다.
1226년 10월 3일 저녁 프란치스코는 포르치운쿨라로 돌아와 형제들의 기도 소리를 들으며 마지막 시편을 낭송하였다. “소리 높여 당신께 부르짖을 때 이 호소를 들으소서……” 그리고 자매인 거룩한 죽음을 맞이하였다. 생전에 이미 살아 있는 성인으로 공경받던 프란치스코는 1228년 7월 16일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인의 유해는 성 조르조 성당에 잠시 모셔졌다가, 1230년 지금의 프란치스코 대성당에 안치되었다.
프란치스칸 영성
프란치스칸 영성이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함으로써 복음의 진리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수도회가 지닌 역사와 영성을 통해 실현하고 발전시킨 정신이다. 프란치스칸 영성의 특징은 복음과 그리스도 중심의 영성, 작음과 형제애, 사도적 영성으로 나타난다.
프란치스칸 영성이 변함없이 추구하는 원천과 지향점은 복음 속의 예수 그리스도와 철저히 일치하는 것으로서, 특히 겸손하고 가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발자취를 따르는 것이다.
수도회의 공식 명칭은 ‘작은 형제회’인데, 이 명칭 안에 프란치스칸 영성의 가치가 담겨 있다. 작음은 한없이 자기를 비우는 여정 안에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성찰함으로써 나오며 자기 이탈과 겸손, 섬김의 자세로 살아가도록 이끌어준다. 형제애는 우리가 모두 성령 안에서 형제자매가 되도록 불러주신 하느님 아버지를 흠숭하고 인간을 사랑하도록 도와준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자신과 형제들의 소명이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임을 분명히 인식하여 회칙에 선교 조항을 최초로 명시한 수도회 창설자이다. 창설자의 이러한 정신을 따르는 프란치스칸들은 사도적 소명을 통해 세상과 교회 안에서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봉사에 자신을 바친다.